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신 전쟁 (문단 편집) === 도바-후시미 전투 === || [[파일:external/dec.2chan.net/1468847962484.jpg|width=580]] || || 鳥羽・伏見の戦い || ''' 보신전쟁의 시발점이자 분수령.'''[* 이 전투가 엄청난 스노우 볼을 굴리게 되면서 사실상 승패는 정해졌다.] 1868년 1월 3일 막부군은 2갈래로 나뉘어 각자 도바 가도(鳥羽街道), 후시미 가도(伏見街道)로 나뉘어 교토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바 가도로 진입한 막부군은 막부보병대(幕府步兵隊)[* 네덜란드 군사교범에 의거하여 1862년 개혁된 군대였다. 보병,포병으로 구성되었고 미니에식 전장식소총을 장비하여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였다. [[막부육군]] 참고.]와 [[미마와리구미]](見廻組)였으며, 막부보병대는 총과 대포로 무장했지만 미마와리구미는 전통적인 갑옷과 창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쓰마군은 도바 가도상에 포진하여 막부군과 대치하였는데 막부군은 자신들의 위세를 믿고 행군대형을 풀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가려다 사쓰마 측과 대치하게 되고, 사쓰마군의 선제 공격이 발생. 초반 포격전에서 운 없게도 막부 측 대포가 맞아 폭발하면서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어서 쏟아지는 사쓰마군의 총격에 장전조차 안해놓고 있던 막부보병대는 반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사령관이자 하타모토(旗本)인 타키가와 토모타카(滝川具挙)[* 당시 그는 관직은 하리마노카미(播磨守)이었다. 생몰은 ? ~ 1881이다.]가 탄 말이 총을 맞고 폭주, '''타키가와 사령관은 등자에 발이 걸린 채로 말에 끌려가며 전장에서 이탈(...)당했다.''' 사령관이 도주하는 걸 눈앞에서 본 막부군은 패닉 상태에 빠져 대탈주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마와리구미가 돌격을 하여 보병대가 전투대형으로 전개할 시간을 벌어 주고, 막부보병대는 대탈주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반격을 감행했으나, 영국식 화력방어전술[* 18~19세기 내내 영국은 제자리에서 초고속 장전사격을 반복하는 물량&화력 방어전법으로 유명했으며, [[워털루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영국의 화망에 걸려들어 궤멸하는 등 위력이 대단했다. 그에 비해 프랑스군은 종대로 사격을 가하고 돌격하는 전법을 주로 사용해서 양측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프랑스 장교들의 훈련을 받은 막부 측 프랑스식 전습대(佛式傳習隊)는 일사불란한 프랑스식 돌격전법을 아주 잘 사용해서 신정부 측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을 사용하는 사쓰마군에게 결과적으로 패배, 그중에서도 신형 스나이더 후장식소총을 사용하는 사쓰마군 부대에게 화력으로 압도를 당했다. 막부군을 비롯한 휘하 구와나, 아이즈 연합군들의 번병들은 대부분이 전장식 미니에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교관들에게 훈련 받은 최정예 부대인 '덴슈타이'들은 당시 에도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후장식 소총을 활용하는 신정부군에게 화력과 전술로 압도 당할수 밖에 없었다. 한편 후시미 가도로 진입한 막부군은 [[신센구미]]와 합류하여 교토 외곽의 봉행소[* 시내의 치안과 재판을 책임지는 관청]로 진입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전근대적인 장비를 갖춘 신센구미와 막부군은 신정부군이 가도를 봉쇄하고 대포로 봉행소를 포격하자 봉쇄되어 교토 진입이 불가능한 처지에 놓인다. 신센구미는 봉행소의 담을 넘어 주특기인 창검을 이용한 돌격을 감행하지만, 사쓰마군의 소총사격에 밀려 다시 봉행소로 돌아오는 추태를 보였다. 사쓰마군의 봉쇄를 풀기 위해 다른 막부군도 여러차례 돌격을 감행했으며 특히 아이즈 군은 조슈 군과 철혈의 사투를 벌이지만 시가지의 엄폐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조슈 군의 총격 앞에 실패하고 지휘부의 무능으로 지원병력이 도착하지 않자 마침내 봉행소는 전소, 거점을 상실한 막부군과 아이즈 군, 구와나 군은 탈출해 교토 외곽으로 후퇴한다. 두 전투 모두 지휘관의 무능이 우세한 막부군을 패배로 몰아넣었다. 도바 방면의 막부군을 지휘하던 타키가와 하리마노카미 토모타카는 마땅히 적병이 있음을 감안하고 전투대형으로 경계태세에 들어가야 했지만 아군의 위세만을 믿고 그대로 지나가려다 패주의 원인을 제공했다. 후시미 방면에서는 막부군이 거점을 굳혔으나 거센 반격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타모토이자 육군 봉행인 타케나카 시게카타(竹中重固, 1828 ~ 1891)가 이끌던 지원병력은 행방불명, 총사령관인 사키노 육군봉행을 비롯한 지휘부는 도바-후시미 전투 3일간 딱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무능으로 패전한 이 전투는 이후 정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막부가 목표인 사쓰마 번으로 향하지 않고 교토로 향한 것은 덴노와 조정에게 사쓰마 토벌의 선지를 무력시위를 통해 받아내어 대의명분까지 얻어내기 위한 행동으로 분석된다. 교토에 주둔한 삿초군은 소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령관인 타키가와 토모타카도 크게 방심했다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